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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p252)
그리스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의 구원 을 위한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발적으로 기꺼이 죽고자 하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온전히 받으실 만한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기꺼히 자진해서 죽으셨기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뻐히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자의 희생제사를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성부께서 정하심: 성경은 성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위해 죽게 하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롬8:32). 하지만 예수님이 아버지께 강요당해서 마지못해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오셨습니다(눅 19:10).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은 성삼위 하나님의 신적인 뜻에 언제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하고자 하심: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생명을 자발적 순종을 통해 내어 주신 죽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죽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원하여 드리는 희생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증언했습니다-“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 10:17).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아버지께 올려 바치는 희생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이 단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자발적 죽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죄인을 향한 사랑으로 거리낌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차녹이 말했듯이, 인간의 손에서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분이야 말로 기꺼이 죽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삶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바치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자기를 비껴 가기를 구했다는 사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도했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은 내키지 않는 죽음이 되는 걸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전망하는 중에도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희생으로 구원 받게될 우리를 향한 기쁨이며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위해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말에 담긴 불안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라는 말에 담긴 순종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향기로운 제물: 바울은 에베소서 5:2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린) 향기로운제물과 희생제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차녹은 “이 달콤한 향기가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태도에서 풍겨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당하는 자리까지 질질 끌려간게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사랑에 순종하셨고, 그 사랑이 예수님의 순종을 자발적 순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쁨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행하신 것 외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죽음(제물)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실 또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죽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제물을 기뻐하신 것은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서 영광 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사 49:3).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삶, 그리고 특별히 자기 죽음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요 13:31).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셨고, 우리의 구원은 성취 되었으며, 예수님은 성부께서 맡기신 일을 지상에서 완수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말하되 그리스도가 감내해야 했던 어떤 일로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어떤 것으로 말합니다.“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일이 있기에 너희도 능히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구원의 토대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가능케하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본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1. 그리도께서 기꺼히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통해 내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가치 있는지)를 나눠 봅시다.
2.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고난의 본을 따라가는 사명을 생각할 때, 현재 내삶에서 내가 감내해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자원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그의 백성들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자발적인 순종의 제사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마음의 중심에 놓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원하는 희생의 순종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쁘시게 받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p252)
그리스의 죽음과 관련하여 우리의 구원 을 위한 중요한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발적으로 기꺼이 죽고자 하셨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온전히 받으실 만한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기꺼히 자진해서 죽으셨기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뻐히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자의 희생제사를 기꺼이 받아들이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를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성부께서 정하심: 성경은 성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위해 죽게 하셨다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롬8:32). 하지만 예수님이 아버지께 강요당해서 마지못해 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오셨습니다(눅 19:10).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뜻은 성삼위 하나님의 신적인 뜻에 언제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하고자 하심: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 생명을 자발적 순종을 통해 내어 주신 죽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분의 죽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원하여 드리는 희생에 대해서 예수님 자신이 증언했습니다-“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 10:17).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를 아버지께 올려 바치는 희생으로 자기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이 단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 뿐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에 대해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자발적 죽음: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죄인을 향한 사랑으로 거리낌 없이 자발적으로 자기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차녹이 말했듯이, 인간의 손에서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분이야 말로 기꺼이 죽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삶을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바치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자기를 비껴 가기를 구했다는 사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까요?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기도했기 때문에 그분의 죽음은 내키지 않는 죽음이 되는 걸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진노를 전망하는 중에도 거기에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희생으로 구원 받게될 우리를 향한 기쁨이며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에 대한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을 위해 예수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말에 담긴 불안보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라는 말에 담긴 순종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향기로운 제물: 바울은 에베소서 5:2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께 드린) 향기로운제물과 희생제물”이라고 설명합니다. 차녹은 “이 달콤한 향기가 그리스도의 자원하는 태도에서 풍겨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고난 당하는 자리까지 질질 끌려간게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사랑에 순종하셨고, 그 사랑이 예수님의 순종을 자발적 순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기쁨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행하신 것 외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죽음(제물)을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실 또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죽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제물을 기뻐하신 것은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서 영광 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사 49:3).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삶, 그리고 특별히 자기 죽음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요 13:31).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하나님은 영화롭게 되셨고, 우리의 구원은 성취 되었으며, 예수님은 성부께서 맡기신 일을 지상에서 완수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을 말하되 그리스도가 감내해야 했던 어떤 일로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어떤 것으로 말합니다.“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일이 있기에 너희도 능히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구원의 토대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을 가능케하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본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희생적으로 살라는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1. 그리도께서 기꺼히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통해 내가 받은 구원이 얼마나 소중한지(가치 있는지)를 나눠 봅시다.
2.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고난의 본을 따라가는 사명을 생각할 때, 현재 내삶에서 내가 감내해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흠 없는 어린양으로서 자원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어 주신 그의 백성들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기쁘시게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자발적인 순종의 제사를 향기로운 제물로 받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를 마음의 중심에 놓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자원하는 희생의 순종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쁘시게 받으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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